책소개
지식을만드는지식의 ‘초판본 한국소설문학선집’ 가운데 하나. 본 시리즈는 점점 사라져 가는 명작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이 엮은이로 나섰다.
핍진(乏盡)한 현실에 대한 입체적 형상화
이기영의 작품 활동은 1925년 카프 가맹과 더불어 본격화된다. 따라서 그의 소설 세계는 카프의 이론 전개와 더불어 소설 세계가 변화·발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초기에 영웅적 주인공을 내세우며 계급 사상에 입각한 계몽주의를 표방했고, 1927년 카프의 제1차 방향 전환 즉, 목적의식기에는 계급의식이 없던 인물이 무산자 계급의식을 각성해 가는 과정을 그리는 작품들이 창작되었다. 1930년대 들어 이기영의 작품들은 카프의 제2차 방향 전환과 관련한 볼셰비키화 노선을 따라 계급투쟁의 실천을 부각시키는 양상을 보인다. 노동자, 농민들이 진보적 지식인에 의해 계급의식을 각성하고 자본가와 전선을 구축하고 파업을 감행한다든지, 지주에 대항해 단결된 행동을 보여주는 등의 실천적 모습들이 형상화된다.
이기영이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평가받는 이유는 이론의 적용에 있는 것이 아니라 탁월한 리얼리즘의 형상화에 있다. 특히 농촌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경우 풍속에 대한 생동감 있는 묘사, 하위 계층의 현장감 있는 언어들, 상징성 짙은 핵심 소재 등을 통하여 이념과 이론의 생경한 흔적을 지우되 비판적이고 고발적인 시각을 살리고 있다.
<호외>는 비교적 초기의 작품으로 노동자들의 조합 활동과 파업 과정을 그렸다. 초기의 작품이 띠었던 당위적 계급의식과 추상성이 보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의 세계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작품이다. <조희 뜨는 사람들>은 진보적인 지식인에 의해 계급의식에 눈을 뜨고 단결하여 자본에 맞서는 제지 공장촌 노동자들의 이야기로, 이기영 소설의 장점인 실감나는 현장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서화>는 당대의 평판작으로서 3·1운동을 전후한 농촌의 현실을 농민의 시각에서 실감나게 보여준 작품이다. 세상이 문명화된다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점점 황폐해지는 농촌의 삶을 풍속의 소멸과 그 대신 횡행하는 노름을 소재로 형상화했다. <서화>는 이기영의 대표작 ≪고향≫의 전주곡에 해당하며, 이기영 소설이 정점으로 향해가는 교두보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서화>가 농촌 현실의 모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황폐화되는 농촌의 모순이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가에는 이르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면, 식민지적 근대화가 불러온 생산관계의 기형성이 농촌 파탄의 원인이 되고 있음을 마름제도를 통해 형상화하는 데까지 나아간 것이 ≪고향≫이기 때문이다.
200자평
일제하 프로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이기영의 단편집이다. 그는 계급주의 문학의 이론을 구체적인 작품을 통해 실체로 형상화했다. 1927년, 1930년, 1933년에 쓰인 세 단편을 통해 이기영의 다양한 작품 세계의 단면과 그 리얼리즘의 탁월한 필치를 맛볼 수 있다.
지은이
이기영은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천안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몰락해 가는 빈궁한 가정환경, 갑자기 세상을 떠난 어머니로 인한 침울한 아동기를 고전소설과 신소설을 탐독하며 보냈다. 1906년 아버지 이민창과 안기선 등이 세운 천안 사립영진학교에 입학해 신학문을 배웠다. 1908년에는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조혼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이기영의 작품 속에서 조혼의 폐습을 비판하고 자유연애를 지향하는 내용이 빈번한 이유가 되었다.
소학교 졸업 후에 한동안 방랑과 방황의 시기를 보내다가 1918년 귀향하여 논산 영화여학교에 근무했다. 3·1운동을 계기로 현대 문학예술을 지향하게 되었으며,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서 고학하였고, 유학생 모임에서 포석 조명희를 만났다. 1923년 관동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한 후, 1924년 ≪개벽≫ 현상 모집에 단편 <옵바의 비밀편지>가 3등으로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다. 1925년에 조명희의 주선으로 ≪조선지광≫의 편집 기자가 되었고, 같은 해 8월 최서해, 이상화, 송영, 한설야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 동맹(KAPF)을 창건했다. 그 무렵 신여성 홍을순과 새 가정을 꾸렸으며, 이후 계속 함께했다.
본격적인 문학 활동과 카프 가맹이 거의 동시에 이뤄짐으로써 이기영의 작품은 창작 방법과 세계관에 있어서 계급주의를 표방하였다. <농부 정도룡>, <조희 뜨는 사람들>, <홍수> 등의 단편소설과 이후 발표되는 중·장편 소설들을 통해 관념 편향적인 계급주의 지도 이론을 구체적이고 실체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이기영은 명실공히 카프 최고의 작가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기영은 카프 중앙위원 및 출판부 책임자를 지내던 중 1931년 카프 제1차 검거로 구속되었다가 2개월 만에 풀려났다. 이때 구상한 중편소설 <서화>(1933)로 호평을 받았으며, ≪고향≫을 집필하여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고향≫은 충남 천안의 원터마을을 무대로 일제강점기 식민지적 근대화에 따라 붕괴되고 재편되는 농촌의 모습을 고도의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내 한국 근대소설사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된다.
1934년 카프 제2차 검거로 다시 구속되어 1년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36년 소시민 지식인의 과대망상증을 통해 당대 사회제도의 불합리성을 폭로하는 장편 풍자소설 ≪인간수업≫을 발표했고, 10월에는 ≪고향≫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일제 말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시국인식간담회에 참석하거나 조선문인보국회에서 일하기도 했으나, 창씨개명과 일어 집필, 강연 요구를 거부하다가 1944년, 강원도 내금강으로 소개(疏開)하여 농사를 지으며 은거했다.
해방을 맞이해 상경한 후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연맹을 주도했으며, 1946년 2월에 월북했다. 노년기까지 조소친선협회 중앙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 등 북한에서 문학예술 분야의 고위직을 두루 거쳤으며 장편소설 ≪땅≫(1948∼1949), ≪두만강≫(1954∼1961) 등을 집필했다. 1984년에 사망하여 평양 신미동 애국열사릉에 묻혔다.
엮은이
노현주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同)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하였다. 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강사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김승옥 소설 연구-의미구조와 사회 변동의 상관성을 중심으로>, <하이퍼텍스트와 현대 비평이론>, <글쓰기의 기원과 나르시시즘> 등이 있다.
차례
호외(號外)
조희 뜨는 사람들
서화(鼠火)
해설
지은이에 대해
엮은이에 대해
책속으로
그런데도 쥐불을 놋는 어룬은 업섯다. 그러나 하필 쥐불뿐이랴! 마을 사람들의 살림은 해마다 주러드는 것 같엇다.
사실 그들은 모두 경황이 업서보인다. 수염이 대자 오 치라도 먹어야 량반 노릇을 한다고―가난한 량반은 량반도 소용업섯다. 올 정월에 떡을 친 집도 몃 집 못 된다. 그러니 쥐불이랴? 세상은 점점 개명을 한다는데 사람 살기는 해마다 더 곤란하니 웬일인가?
– <서화>